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5차 초공작전 (문단 편집) === 준비단계 === 7월 23일 장제스는 [[쑨원]]을 기념하면서 <현대 군인이 알아야 할 점>이라는 강연을 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상벌을 엄정, 공평하게 할 것. * 2. '군인의 최대목적은 [[삼민주의]]를 위해,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 죽는 데 있다'고 부하에게 분명히 가르칠 것. * 3. 개인의 생명은 민족 전체의 역사적 생명을 바꾸고 합일시킴으로써 영원히 발양된다고 하는 '생명의 진의'를 부하에게 확실히 가르칠 것. * 4. '군인의 책임은 국가를 보호하고 민족을 발전시키며 주의를 실현시키는데 있다는 것'이라는 점과 '현재 가장 가까이 있으며 강력한 적이야말로 강서의 공산주의자들'임을 부하들에게 철저히 교육시킬 것. 그리고 중구난방으로 조직되어 작전 수행에 장애를 주었던 부대 편성도 개편하였다. 기존의 여단을 폐지하여 2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던 기존의 1개 사단을 3개 연대로 구성하게 했고 연대 이상의 부대에는 척후부대와 수송부대를 별도 편성하여 산악작전을 원조하게 했다. 또한 직계군의 소대장 이상의 간부 7500명에게 레인저부대식 훈련을 시켰으며 전선 경계와 후방 원호 강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했는데 이러한 군제 개혁은 8월 말에 완료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5천만 달러를 비롯한 여러 서방 국가에서 차관을 들여와 군사력을 강화했다. 또한 공군의 3개년 건설계획이 책정되어 5차 초공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3개의 비행장이 건설되었고 국민혁명군 공군은 중앙 소비에트 지역에 대해 공중사진을 촬영하면서 홍군의 기관총 기지를 수색하는 한편 [[태평천국]]을 토벌했던 [[증국번]]과 위구르를 토벌한 [[좌종당]]의 전술을 연구하며 토벌작전을 계획했다. 거기에 1933년 5월 22일 장제스의 초청을 받은 [[한스 폰 젝트]] 장군이 중국을 방문하여 장제스를 예방하고 중국군을 시찰했다. 젝트 장군은 6월에 중국을 떠나면서 비망록을 장제스에게 넘겨주어 중국군 개혁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는데 이에 따라 자체적인 무기 조달을 위해 독일과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100여명에 달하는 독일 군사고문단]]을 받아들였다. 이들 독일군사고문단은 여러 정예부대를 독일식 무기로 중무장시킴으로써 공산당 토벌에 협조했다. 10월 2일 장제스는 난창행영에서 초공작전에 투입될 사단장, 참모장들을 모아 초비회의를 개최하여 제5차 초공계획을 입안했다. 이때 장제스는 소비에트 지구에 한 톨의 쌀, 한 줌의 소금, 한 방울의 물도 보급되지 못하게 하는 '엄밀봉쇄 전략',[* 장개석비록에 따르면, 이는 중국 근대사에 관심이 대단히 많았던 장제스가 [[건륭제]]의 대금천과 소금천 정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적의 교통을 차단하고 아군 교통을 정비하는 '교통전략', 정부군이 전진하는 모든 지역에 토치카를 구축하여 봉쇄선을 펼친다는 '토치카 전략'을 재확인했다. 이러한 토치카는 2~5km마다 설치되어 강서성 전역에 3천여개에 달했으며 기관총이 배치되어 홍군의 공격에도 대처할 수 있어 보급로를 확보하는데 용이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사용한 [[중대전술기지]]와 근본적인 목적은 같다. 게릴라전을 구사하는 적들이 이동하지 못하도록 길목마다 화력 진지를 설치하고, 지역 주민들과의 접촉을 끊어버림으로써 게릴라들이 보급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 장제스는 난창행영 총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난창행영에 4개 종대를 편성하였다. 북로군은 [[구주퉁]]이 지휘하는 38개 사단으로 주공을 맡았고 남로군은 천지탕이 지휘하는 광동군 9개 사단으로 남쪽 방어를 맡았으며 서로군은 [[허젠]]이 지휘하는 14개 사단으로 공강 서안의 홍6군단을 견제하며 홍군의 서쪽 탈출을 방지하고 동로군은 차이팅카이가 지휘하며 6개 사단으로 복건의 홍군을 견제하도록 했다. 60만에 달하는 중앙군 육군에 공군, 포병, 통신병, 수송대까지 합쳐 75만명의 중앙군이 동원되었고 여기에 각 지방부대, 경위대를 합쳐 100만명의 대군이 동원되었다. 1933년 9월 25일 북로군 8종대 소속 5사단, 6사단, 56사단이 홍군이 복건 침공에 매달리는 틈을 타서 홍군 7군단이 수비하던 강서성 이천현을 기습공격으로 점령하는데 성공함으로 국민혁명군의 전략이 주효함이 입증되었다. 이천을 수비하던 홍군 지휘관 소경광은 도주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천의 함락에 크게 동요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